KAIST 대학원생들의 스타트업 초기 투자 실패 경험
'개발자 1명당 5,000만원 묻지마 투자'라는 루머의 희생양
(주)하얀마인드를 호기롭게 창업하고, 나는 영어 교육에 대한 사업 아이템으로 투자 유치에 나섰다. 당시 내가 어디선가 들었던 'KAIST에서 개발자들이 모여서 팀 창업을 하면, 1명당 아이템을 보지 않고 '묻지마'로 5,000만 원 투자"라는 루머를 강하게 믿고 있었다. 주변에서 투자를 곧잘 받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고, 우리 팀 개개인의 실력도 우수했다고 생각했기에 내가 초기 투자에 어려움을 겪을 줄은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이템을 보지 않고"라는 부분은 전혀 사실이 아니었다.
우리 팀은 초기에 '음성 콘텐츠로 영어 쉐도잉을 연습할 수 있는 모바일앱'이라는 아이디어를 가지고 초기 투자에 관한 미팅들을 진행했다. 우리 팀은 해당 아이템으로 KAIST E*5라는 학생창업경진대회 3위 수상이라는 타이틀도 가지고 있었기에, 초기 프로토타입 및 시장 테스트를 위한 엔젤/시드 라운드의 투자는 어렵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특히 두 명은 박사과정 고년차였고, 다른 1명은 석사 논문을 어학 학습에 관련된 주제로 쓰고 있어서, 여러모로 강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린 스타트업 정신에 따라, 아주 최소한의 기능만 가지고 있는 프로토타입 앱을 만들어서 몇몇 투자자들과 미팅을 진행했다. 대부분의 경우 팀은 괜찮은 것 같은데, 아이템의 시장성에 관한 부분에서 의문점을 제기했다. 아이템을 바꾸면 투자를 고려해보겠다거나, 그 아이템은 시장 진입조차 어려울 거라는 부정적인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나는 온라인에서 스타트업과 관련된 영상 및 글을 많이 보는 편인데, 그곳에서 항상 들어왔던 '결국에는 팀'에 투자한다는 유명한 투자자들의 가르침을 생각하며 고집대로 계속 밀어붙였고, 근거 없는 낙관 속에 결국 투자 유치 과정은 장기화되었다.
성과 없는 미팅들로 서울에도 종종 다녀오고 힘이 빠져갈 즈음에, 한 기관 투자자의 심사역에게서 연락이 왔다. "꼭 투자하고 싶다." 내부적인 절차와 예상 기간 등을 전달받고,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이라 여겼다. 역시 "투자 과정은 코드가 맞는 1명의 투자자를 찾는 게임"이라는 말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식 IR 및 투자 미팅이 몇 번 진행되었고, 담당 심사역님은 "내부에서 약간의 마찰이 있기는 했지만, 제 경험으로 볼 때 문제없이 잘 통과될 것 같습니다."라고 말을 전했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 후 우리는 해당 심사역에게 "회사에서 의견 충돌로 퇴사하게 되었습니다."라는 통보를 받고 좌절에 빠지게 된다.
우리 팀은 대학원 학업을 중단하고 바로 풀타임으로 창업에 뛰어들었기 때문에, 이런 초기 투자 유치의 실패는 팀원들의 생활비 문제로 귀결이 되었다. 각자 학생 시절 모아둔 돈이 몇 백만 원 정도는 있었지만, 이 돈도 수개월이 지나자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투자 유치 실패로 사기는 바닥으로 떨어진 데다가, 실제로 생활을 버티게 해 줄 최소한의 자금 마련이 매우 시급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부모님 집을 찾아가게 된다.
당시 부모님은 내가 박사과정 학업을 중단하고 갑작스레 창업을 하게 된 것에 대해 달가워하시지는 않았다. 박사 과정 마무리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라서, 더더욱 나의 결정을 이해하기 힘드셨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젊은 나이에 잘 맞는 같은 꿈을 꾸는 사람들이 같은 시간과 공간에 모여 있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고 부모님의 반대에도 지체 없는 창업을 강행했던 터라, 부모님께 현재 겪고 있는 어려움을 털어놓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아버지께서 나와 저녁 식사에 반주를 한 잔 하시면서 사업계획을 간단하게 들으시더니, 이전에 실패한 기관 투자자와 동일 조건으로 본인이 투자를 하면 어떻겠냐라는 제안을 했다. (참고로 우리 집은 가족 간의 재산 분리 개념이 아주 확실하다) "안 그래도 요즘 저금리에 투자할 곳이 마땅치 않은데, 아들 비즈니스에 투자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이네."라고 말씀하시며, 바로 필요한 최소 금액과 투자 계약서를 달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바로 투자계약을 작성하고, 며칠 후 투자금을 입금해주셨다. 아마도 이 초기 자금이 없었으면, 아마도 지금 우리 회사는 없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사실 별거 아닌 것 같은 이 투자는 우리 회사의 최소한의 운영자금 조달 외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왜냐하면 투자금이 입금이 되자, 우리 팀에는 약간의 여유가 생겼고, 그 여유를 재료로 사업 아이템 피벗이라는 중요한 결정을 빚어냈다. 멀리 돌아왔지만, 우리 팀은 그 사이에 많은 팀워크, SW 개발 기반 구축, 모바일 러닝에 관한 경험 등의 노하우를 축적할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사업의 결과물만 보고 판단을 하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 이렇게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숙성된 팀에는 눈에 보이지 않은 엄청난 내공과 경쟁력이 축적되어 있다.